Over the cosmic air.
K/G&K


 여기서 사라질 목숨이 아니다. 카르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정신이 흩어져 소멸할 것 같은 정도의 고통이었다. 올바른 미래를 알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자신이 쓰러지는 순간 그 미래는 지워진다. 그곳까지 다다르는 일. 살아남는 일.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치 망자와 같은 모습이구나.”


 물론, 그것도 눈 앞의 이 남자에 달려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짓 하나만으로 카르나는 당장이라도 먼지처럼 흩어질 수 있다. 죽여도 죽지 않겠다는 의지라면 차고 넘칠 만큼 있었지만, 의지에 의한 기적이 언제까지나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은 카르나 역시 알고 있다. 가져갈 수 있다면 목을 주겠다 약속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승자의 결정을 기다리는 푸른 눈동자가 일그러들었다.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익숙했다. 피투성이로 전장에 선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지금 느끼는 아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견디고 또 견딜 뿐이다.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자비 깊은 왕의 모습이었으나, 지울 수 없는 날카로움을 담은 눈빛이었다. 이 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카르나는 문득 그렇게 느꼈다.  


 “됐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달하거라.”


 네 녀석의 목은 필요없다, 영웅왕 길가메쉬는 그렇게 고했다. 겨울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멀고 먼, 그러나 확실히 찾아올 봄을 예비하는 북쪽의 바람. 무언가 대답을 하고 싶어도 목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소리가 되지 않는다. 지나코가 의식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카르나 역시 눈을 감았다.


*


 지나코는 다시 용무원실에 틀어박혔다. 새로운 게임에 몰두하고, 무의미하게 네트워크를 헤메이는 생활이었다. 가끔 키시나미가 찾아왔지만, 지나코는 날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둘렀다. 평온하다면 평온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죽음의 경계에 선 육체를 짊어지고, 카르나는 묵묵히 그 옆을 지켰다. 


 어스름에 물든 교정에도 밤은 있었다. 이 곳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있어 얼마 없는 안식의 시간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니터의 불빛은 엎드린 지나코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잔뜩 찌푸려졌지만 굳게 닫혀있는 눈꺼풀과 규칙적인 숨소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카르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그만한 몸 상태가 되지 않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아무리 모두가 잠든 밤이라고는 하나 무방비한 마스터의 옆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은 서번트 실격이라고 불러도 좋을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용무원실의 바깥으로 나온 것은, 아무리 주인에 충실한 카르나라고 해도 조금은 바깥 공기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빈사 상태에 가깝지만, 카르나는 그 태생부터 철저한 무인이었다. 좁은 방 안에서 팔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러나 밖에 나온다고 해서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용무원실의 문에 기대 바깥을 바라보다, 다시 들어간다. 그것뿐이었다.


 오늘도 카르나가 바라보는 창문 너머의 하늘은 어두웠다. 태양을 마주한 것이, 벌써 얼마 전의 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수리야시여, 당신을 뵙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카르나는 머리를 수그리며 아버지의 이름을 되뇌었다. 밤이 지나면 이 교정은 기나긴 황혼에 머무른다. 달의 뒤편이 보여주는 거짓된 낮이라고는 하나, 그 시간은 역시 태양의 위광이 미치는 때이다. 그러나 지나코가 깨어 있는 한, 카르나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분명 지나코는 카르나가 언제 어디를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라지면 잔소리꾼이 사라졌다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옆을 지키는 것은 카르나에게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의무였다. 그저 이렇게 잠깐, 아무도 없는 복도에 서 있는 것만이 카르나가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태양신의 아들아. 밤은 네놈의 성미에 맞지 않느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카르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빛나는 황금 갑옷은 밤이 깔아놓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없을 터였던 복도 저편에서, 길가메쉬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흥, 너 정도 되는 영령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다니. 모르긴 몰라도 몸이 어지간히 상한 모양이구나.”

 “……무슨 일인가, 영웅왕.”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카르나는 머리를 짚었다. 자신과는 모든 점에서 정반대인 저 영웅왕을 대하는 것은 솔직히 힘들다. 무기를 맞대는 것만이라면 차라리 낫다. 그러나 애시당초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정반대인 것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언변으로 그와 대화하는 일은 창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카르나를 바라보며 길가메쉬는 웃었다. 


 “대가를 받으러 왔다. 나에게 바쳐야 할 것이 있을 텐데?”

 “……그건.”

 “모른 척 할 셈이냐? 그러고도 베푸는 영웅이라니, 호칭이 울겠구나.”


 카르나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 자신은 그때 길가메쉬가 물러나 주는 대가로 목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길가메쉬 역시 말하지 않았던가.


 “내 목은 필요없다 하지 않았는가.” 

 “내 마음이 바뀐다면 목을 내놓을 테냐? 지금의 네 녀석 따위는 재보를 열 필요도 없이 쓰러뜨릴 수 있거늘.”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호오, 네놈의 마스터가 부서져가는 건물의 잔해에 깔려 땅을 기는 지렁이처럼 죽어가도 상관 없단 말이냐.”

 “…….”


 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말은 소용없었다. 이 자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 카르나의 생각도, 미래도, 그 무엇도. 카르나가 갖고 있는 유일한 것은 생과 사의 경계선에 있는 목숨뿐이었으나, 길가메쉬는 이미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탐욕스러운 왕은 무언가를 요구했다. 


 틀림없이, 그저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어두운 창 밖에서 빛나는 벚꽃이 침묵과 함께 흩날렸다. 모든 이가 잠든 인공의 밤. 허수로 만들어진 전자의 바다에, 신화 시대의 존재들만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자와, 기나긴 잠이 예비되어 있는 자였다.


 "흥, 바보같은 녀석. 네놈의 무구는 꽤 봐줄 만 했다만, 쓰는 사람이 이리 멍청해서야 신을 죽이는 창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신랄한 말과 달리,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길가메쉬의 입꼬리는 한층 더 올라갔다. 피할 새도 없이, 뻗어나온 황금 갑주의 팔이 카르나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받아가마.”

 “―!!”


 드물게도 카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맞닿은 입술은 흔히 친애, 혹은 열정을 나타내기 위해 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스며드는 숨결은 진한 마력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서번트에게 있어서는 생명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힘이었고, 지금의 카르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벌어진 입술에, 길가메쉬가 목을 울리며 웃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밀려들어온 뭉근한 살덩이가 입천장을 핥았다. 타액을 통해 전해져 오는 마력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달다. 


 한참이나 입 안을 희롱한 뒤, 길가메쉬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젖은 입술을 닦으며, 카르나는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다. 길가메쉬의 마력 덕분인지 확실히 호흡 자체는 편해져 있었다. 


 “꽤나 처녀 같은 반응을 하는구나. 설마 처음은 아닐 터이고.”

 “왜, 이런…….”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길가메쉬의 모습에, 카르나는 당연하다면 당연할 의문을 던졌다. 길가메쉬가 아무리 규격 외의 서번트라고는 하나, 마력이 무한정 흘러넘칠 리 없다. 오히려 그 역시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요사스러운 빛을 띤 붉은 눈에서는 명백한 즐거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 뿐이다.”

 “……무슨 소리인지,”


 마력을 받은 것은 자신인데, 그는 무엇을 받았다는 말인가? 혼란에 빠진 카르나를 바라보며 길가메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영웅왕은 선고했다.

 

 “나는 쾌락을 받을 것이다.”


 귀에 와닿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달콤하고, 뜨겁다. 


 “창도, 갑옷도, 목숨도 없으니― 네가 나에게 바칠 것이 몸밖에 더 있겠느냐?”


*


 그날 밤 이후, 카르나는 때때로 길가메쉬와 몸을 섞었다. 그것은 단순한 입맞춤에서 멈출 때도 있었고, 때로는 조금 더 내밀한 행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몸을 이용한 한때의 쾌락. 그것은 길가메쉬의 사욕을 채우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카르나의 목숨을 잇는 생명줄이기도 했다. 그의 마스터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마력으로는 빈사 상태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카르나에게 다른 마력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뇌 공간의 게임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길가메쉬는 카르나가 받아들이는 마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카르나를 안았다. 지극히 원초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연인 사이에 오갈 법한 다정한 밀어蜜語는 없다. 그러나 열기와, 한숨과, 등이 저릿해지는 쾌감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뿌연 실체로 존재했다. 


 “쾌락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들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지. 그걸 누가 주워먹고 살아남든, 내가 알 바 아니다.”


 작게 떨리는 하얀 몸을 훑어내리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마력에 관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자극에 흐려진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정도는 지나코의 모니터에서 때때로 흘러나오는 학생회실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곧 끝난다. 키시나미가 용무원실을 찾아온 날, 카르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나는 너희들과 협력하지 않는다. 계약을 끊을 생각도 없다.”


 키시나미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카르나는 희미한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부탁받은 일을 거절했다는 죄책감만은 아니었다. 길가메쉬와 다시 한 번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아 버린다는 아쉬움만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마스터를 위해서라면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낙담하는 키시나미의 옆에서 길가메쉬는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너의 목 따위는 필요 없다. 너에게는 처음부터, 내가 손을 쓸 정도의 가치는 없었으니.”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와 서늘한 눈빛이 너는 자유라고 고했다. 네가 원하는 곳에서 멋대로 죽으면 된다고.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카르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뜻했다. 카르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상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순간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배신당하고, 저주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그런 것들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은 일임에도 가슴을 찌르는 아픔은 가시지 않았다. 살갗을 마주댄다는 일은 많은 자국을 남기는 행위라고, 카르나는 이제 와서야 실감했다. 


 “뭐라고 말해도 좋다. ―학생회실로 돌아가라.”


 마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딱 자른 거절이었다. 키시나미는 힘없이 용무원실을 떠났다. 영체화 직전의 길가메쉬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카르나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이윽고 기척이 사라지고, 그가 남기고 간 낮은 조소만이 바닥을 맴돌았다.


 “정말로 거절해도 괜찮슴까?”

 “무슨 말이지, 지나코.”

 “…아무것도 아님다.”


 지나코는 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갔다. 카르나는 묵묵히 그 옆을 지켰다.


 그날 밤, 길가메쉬는 카르나를 찾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에 삐걱이던 복도는 다시 정적을 찾았다. 카르나는 밤의 외출을 그만둘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끝이 머지 않았다. 


*


 소거는 몸의 끝부분부터 진행되었다. 황금의 갑옷에 감싸여 울부짖는 지나코의 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지나코=카리기리의 서번트 '카르나'로서 존재했던 의식이 흩어져 간다. 담담히, 카르나는 소멸을 받아들였다. 몸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고, 끝없는 어둠과 진공만이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조차 몇 초 이후에는 끊어질 것이다.


 문셀이 준 마지막 유예의 시간에, 카르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벚꽃 흩날리는 황혼의 옛 교사校舍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끈질기게 앞을 향했던 사람. 절망에 빠진 소녀에게 손을 뻗었던 승려와, 결국에는 두려움을 극복한 어린아이. 서로를 믿었던 학생회실의 소년소녀들.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살아갈 결의를 한 자신의 마스터. 


 그리고, 고대의 영웅왕.


 -너는 베풀고, 나는 빼앗는다. 


 처음 본 날, 길가메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와 보냈던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소멸의 순간에 몸을 누인 지금까지도 카르나는 길가메쉬와의 만남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단순히 싸움에서 패배한 아쉬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카르나는 알지 못했다. 그는 아픔과 동시에 쾌락을 주었고,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이어가게 했다. 그의 앞에서 카르나는 ‘베푸는 영웅’이 아니었다. 


 눈 앞이 완전한 어둠으로 젖어들었다. 이명耳鳴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지나코의 울음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끊어졌다. 모든 것이 차단된 어둠은 의외로 편안했다. 육체적 구속이 사라진 상태는 해방감마저 느끼게 했다. 몸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정신이 흩어질 차례이다. 마지막 순간에 생각하는 것이 그 남자라는 사실에, 카르나는 조금 웃고 싶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모순적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길었던 유예도, 이제 곧 끝나서―


 “호오, 시간이라.”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보일 리 없는 황금의 빛이 보였다.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던 자신의 존재가 소멸을 막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다시 구축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 생겨난 시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빛에 카르나는 눈을 찡그렸다. 끝없이 펼쳐진 허수의 공간을 배경으로, 오만함으로 가득 찬 붉은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뻔뻔하구나. 대체 몇 번이나 나의 자비를 바라는 것이냐?”

 “…너는.”


 죽어가는 나를 위해 문셀이 만든 환각인가. 무심결에 올라온 말을 삼켰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비뚤게 웃었다. 


 “아직 자기 인식도 제대로 못 하는 게냐. 유령에 가까운 건 네놈 쪽이다.”


 카르나는 시선을 내렸다. 희미한 반투명의 형체만이 남아 있는 자신의 팔다리 뒤쪽으로 머나먼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스스로의 몸조차 만질 수 없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자신은 한없이 허상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베푸는 영웅아. 왕의 침실에 허락 없이 들어온 죄, 무엇으로 갚을 테냐.”


 달의 뒷면, 어둠의 바다. 문셀이 통제할 수 없었던 영령 길가메쉬가 잠들어 있던 곳. 카르나가 존재하고 있는 곳은 그의 말마따나 길가메쉬의 침실이라고 해도 좋은 장소인 모양이었다. 카르나는 말없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앞에 섰을 때에는 언제나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유 없이 자신이 이 곳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카르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말했듯, 나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갑옷도, 창도, 너와 싸워 내줄 목숨도 없다. 이제는 너의 쾌락을 만족시켜줄 육체도 없는 것 같구나.”

 “…….”

 “이런 나에게서도 가져갈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져가라.”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길가메쉬의 웃음이 짙어졌다. 원초의 모습을 한 그가 카르나의 앞에 서 턱을 잡아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부터 열이 돌았다. 허상이 질량을 가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마음을 내놓거라.”


 그의 속삭임이 카르나의 숨을 틀어쥐었다.  


 “욕망을 만들어라. 욕정을 만들어라. 원하고, 구하고, 탐해라.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네 탐욕을, 모두 나에게 바쳐라.”


 과연 세상에 다시없을 폭군의 명령이었다. 아직 카르나가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것을, 그는 자신에게 바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영원에 가까운 흐름 속에서도 퇴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붉은 눈동자가 선언했다. 


 “너의 가장 귀한 재보를, 이 내가, 영웅왕 길가메쉬가 가질 것이다. ―카르나.”


 영웅왕이 베푸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이 대가를 지불할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런 예감과 함께 카르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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