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카르나는 처음 보는 곳에 있었다.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안개낀 녹빛의 어둠에 군데군데 섞여든 연한 햇빛이었다. 그곳이 숲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키자 아침 이슬에 젖은 낯선 고목의 냄새가 폐를 채웠다. 카르나는 몸을 숙여 바닥의 흙을 집어올렸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쥐었다 펴는 손에는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부서진 모래가 흘러내리고, 청명한 아침 공기가 활력이 되어 혈관을 흘렀다. 들이킨 숨 자체가 마력이 되어 몸 안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서번트로 소환되어 새로운 시대에 현계한 기억은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던 그 때와는 달랐다.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에 한 박자 늦게 놀라움이 찾아왔다.
자신에게는 몸이 있었다. 호흡하고, 열을 느끼고, 피를 흘리며 대지에 설 수 있는 몸. 지금은 한 줌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전차를 타고 활을 쏘며 친우와 평원을 달리던 그 때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카르나는 팔을 휘둘러 무기를 불러냈다. 신살창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손바닥에 감겨드는 익숙한 무기에서는 희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원인은 창이 아닌 카르나 자신 쪽에 가까웠다. 마스터로부터 마력을 받았던 성배전쟁의 기억과 다르게, 자신을 채우는 생명력의 근간이 이 땅 자체에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카르나는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머리를 강하게 맞은 충격을 느꼈다.
마스터가, 없다.
마스터란 본래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인 영령을 매어두는 쐐기와 같은 존재였다. 카르나가 영령으로서 불려나갔던 몇 차례의 성배전쟁에서, 마스터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바람, 상황과 이유를 갖고 그를 소환했다. 그들이 성배에 거는 기원은 카르나를 이미 떠난 세상에 다시 한 번 불러들였고, 손에 쥐고 싸울 무기와 전장을 주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카르나에게는 성배에 걸어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없었다. 따라서 성배전쟁에서 그의 목적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소환한 마스터의 무기가 되는 것 뿐이었다.
그는 창이었다. 동시에 활이었고, 전차였다. 아무리 뛰어난 활이라도 스스로는 화살을 과녁에 맞추지 못한다. 날카로운 창도 쓰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뚫지 못한다. 마부 없는 전차는 헛되이 날뛸 뿐이다. 카르나는 손에 쥔 창을 내려다보았다. 이 창은, 자신은 왜 이 곳에 존재하는가. 머릿속에 밀려들어오는 온갖 지식 속에 그 대답만이 없었다. 여전히.
- 정말로?
순간 현기증이 났다.
발 밑은 끝없는 공동이었다. 나무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햇빛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손에는 기시감이 감겨들었다.
- 무료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밤이 속삭였다.
- 시체의 눈동자도 이보다는 생기가 있겠군.
아, 이것은 꿈이다. 혹은 환상. 이미 숲은 온데간데 없었다. 방금 전까지의 현실은 처음 현계했을 때의 기억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로소 과거의 자신이 가진 의식에서 헤어나온 카르나는 짧게 탄식했다. 그의 자각과는 상관없이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깜깜한 시야에 언뜻 붉은 빛이 보인 듯 했다.
- 주인 잃은 창병아, 내 손에 떨어지겠느냐?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나와 카르나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카르나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손대지 마라. 그 안에 있는 것을 해하려 한다면, 그 누구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허공에 토해지는 숨결은 아무런 파장도 낳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 그것의 생사는 내가 주관할 것이다.
속삭임은 당당한 목소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온 몸에 전해지는 고통에 카르나는 눈물 흘리며 신음했다. 그러지 말아라. 원하지 않았던 아이, 바란 적 없는 생명이라 해도, 나는 이 아이를 낳고 싶다. 저 밝은 태양 아래에서, 자신의 혈통을 당당히 여기며 자라게 하고 싶다. 사랑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도 온전히 사랑받고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그러니 앗아가지 말아다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이 세상을 사랑할 기회를 다오.
속삭임이, 웃은 기분이 들었다.
카르나는 눈을 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기억에 있는 화려한 천장에서 갑작스레 찾아든 눈부신 금빛이 아팠다. 조금 시간을 들여 눈을 감았다 뜨자 흐렸던 시야와 기억이 점차 명확하게 형태를 갖췄다. 잠겨가던 석양 속에서 빛나던 왕의 보물고가 선연히 뇌리에 떠올랐을 때, 카르나는 일순 숨을 멈췄다. 지키고자 했던 것. 나의 아이. 그것을 잃었다면 자신은 눈을 뜰 이유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몸 안에서는 여전히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카르나의 놀람에 반응하듯 맥동하는 작은 생명에, 카르나는 들이킨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야 깨어났나."
시야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 무표정한 붉은 눈동자가 카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의 손에 제지당했다.
"더 누워 있어라, 당장 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카르나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몸 안의 생명력이 텅 비어 있었다. 땅에 발을 딛으면 당장에라도 꼴사납게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았다. 적어도 이 남자 앞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긴…… 너의 거처인가."
입 밖으로 빠져나온 목소리는 카르나 스스로의 생각보다 훨씬 메말라 있었다. 길가메쉬는 말없이 긍정했다. 카르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 싫을 정도로 느꼈던 형형한 살기는 이제 없었다. 지금 당장 카르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닐 듯 했다.
"왜 나를 데려왔나."
"너를 데려와? ……착각하지 말아라."
길가메쉬가 서늘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내 것'을 잡아오는 것에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더냐?"
"내 것이라니."
"내 것이고말고. 네 뱃속에 들어 있는 것도, 그걸 품고 있는 너도."
길가메쉬는 몸을 숙여 이불에 덮인 카르나의 복부를 쓸어내렸다.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발톱을 숨긴 맹수의 손이었다. 본능적인 경계로 딱딱하게 굳어가는 몸에, 오만한 핏빛 눈이 찌푸러들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경계는 치워라."
"……."
맞는 말이었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길가메쉬는 지금 당장 손짓 한 번으로 연약한 육신 안에 숨쉬는 두 개의 생명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의미로, 그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자였다. 길게 숨을 내쉬고, 카르나는 길가메쉬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단단한 침묵이 넓은 방을 메웠다.
고대의 영웅왕. 인류의 북풍. 유일무이한 폭군이자 재정자. 길가메쉬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았다. 오랜 정원에 거하는 왕은 때로는 잔인했고, 때로는 관대했다. 그는 수만의 목을 베면서도 한 명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고, 인간을 멸시하면서도 사랑했다. 부를 아까워 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탐하였으며, 고귀한 피를 이은 신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시대에 신대는 종말을 고했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지만, 카르나는 휘어진 곳 없는 그의 오만함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독선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 카르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글쎄, 어찌할까."
가슴에 뻗은 긴 손가락이 목을 지나 턱을 들어올렸다. 가늘게 뜬 눈이 차게 빛났다.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에 사슬을 매어 둘까. 지금의 네놈이라면 굳이 엘키두를 꺼낼 필요도 없겠지."
"……."
"아니면, 아예 내 보물고에 들어갈 테냐? 귀한 것을 품고 있으니 특별히 넣어 주마."
무표정한 얼굴이 마냥 농담으로만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험악한 말과는 다르게 정말로 카르나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면 될 것을. 실제로 아까 에미야 저 앞에서는 귀한 보구를 꺼내서까지 카르나를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았던가. 말과 일치하지 않는 길가메쉬의 행동에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돌려 말하는 것은 카르나의 특기가 아니었다. 떠오르는 의문은 그대로 입에 담겼다.
"너는."
"음?"
"내가, 곁에 있기를 바랐던 건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길가메쉬는, 이윽고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말라 했거늘, 하다하다 못 하는 말이 없군."
"……."
"그래, 그렇다면 어쩔 테냐?"
"……?!"
길가메쉬의 손이 카르나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불의의 습격에 뒤로 넘어간 카르나의 몸을, 그의 양 팔이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빛을 등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말해 봐라. 아둔하고 건방진 태양신의 아들아. 지금 그걸 물어서 어쩔 셈이냐, 응?"
"……어쩌다니, 무엇을."
카르나는 눈을 깜빡였다. 몸을 덮는 익숙한 체향과 온기에, 처음 현계한 날과 같이 심장이 낯설게 맥동했다. 귓가에 부드럽지만 날선 저음이 내려앉았다.
"이제 와서 무엇이 알고 싶은 게냐? 나의 아이를 가져 놓고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주제에."
"그건…… 윽."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네 말솜씨를 들으면 다시 화가 날 것 같으니."
말하지 않았던,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길가메쉬가 이 일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카르나가 그것을 입에 담기 전에, 길가메쉬의 손에 들어가는 힘이 강해졌다. 어깨를 파고드는 아픔에 카르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길가메쉬는 속삭였다.
"나는 내 것을 되찾아왔을 뿐이다. 그뿐이라 여겨라."
그것은 명령이라기엔 지나치게 다정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