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꿈을 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 낯설지는 않았다. 기실, 영령의 좌에 선 영령들이 생을 반추하는 감각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장 처음에 받았던 피와 살로 된 육신이 가졌던 기억도, 마력으로 짜여올려진 서번트의 영체에 깃든 감정도, 좌에서는 모두 꿈처럼 아스라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니, 반대인가. 영령은 좌에서 오히려 잠들어 있는 것이고, 육신을 받아서야 비로소 깨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어느 땅을 디디고 서 있느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꿈을 꾸는 중일까.
"……."
카르나는 눈을 떴다. 흐려진 시야에 빛이 들어찼다. 눈가를 간지럽히는 햇빛은 어느 기억보다도 강렬했다. 길게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대지의 달콤한 마력이 혈관을 맥동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끝을 들어올렸다. 처음엔 손가락, 다음엔 손목, 그 다음에는 팔. 움직임은 녹슨 고철처럼 뻣뻣했지만 아픔은 없었다.
카르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벽마다 커다란 창문이 나 있는 이 공간은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온실에 가까워 보였다. 침대와 테이블 하나만으로 꽉 들어찬 방에는 빛이 가득 차 넘실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장소 중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카르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보는 곳이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주위는 적막했다. 그 흔한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널따란 침대만이 놓여 있는 살풍경한 방에 다른 이의 흔적은 없었다.
"……!"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에 카르나는 배를 움켜쥐었다. 또 하나의 생명이 느껴지던 몸의 안쪽은 원래 그러했듯 허전하게 텅 비어 있었다. 아픔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짧고 강렬했다. 식은땀과 깨달음이 동시에 등을 타고 흘렀다.
이곳은 후유키이다. 몸을 흐르는 마력은 후유키의 지맥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후유키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카르나가 살리고자 했던 누군가의 부재를 의미했다.
밝은 빛 아래에서, 카르나는 숲 속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느꼈던 절망을 다시 한 번 삼켰다. 후들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무도 없는 협소한 방의 적막이 불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르나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카르나도 잘 아는 이였다.
"카르나 씨! 깨어났구나!"
"……린."
"오늘쯤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몸은 좀 어때? 아프진 않고?"
"나는 괜찮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다들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린은 들고 온 꽃병을 협탁 위에 거의 던지듯이 내려두고 카르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물로 일그러진 눈에 비쩍 마른 자신의 모습이 일렁였다. 아무리 냉정한 마술사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녀는 본질적으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회복을 기뻐해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더더욱, 물어야 했다.
"그런데, 린."
"응?"
"……아기, 는."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작게 벌어진 린의 입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그래, 그것부터 말해 줬어야 했는데."
"린?"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보이는 기색은 아니다. 불안감 사이로 혹시나 하는 희망이 혼탁하게 섞였다. 제 멋대로 잘게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카르나를 바라보던 린이 웃었다.
"아기는 무사해. 걱정 마."
"……정말, 인가."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단숨에 풀렸다. 살아 있다. 자신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생명이,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숨을 쉬는 것이 한층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주 건강하고, 또……. 아니, 직접 보는 게 낫겠다."
궁금한 건 많겠지만, 그래도 나한테서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잖아? 그렇게 말한 린이 카르나의 소맷자락을 끌었다.
"내려가자. 걸을 수 있겠어?"
"아, 응. 괜찮다."
몸에 힘은 없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벽에 손을 짚은 채 카르나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린이 문을 열고 그를 이끌었다. 방은 처음 보는 곳이었지만 복도는 눈에 익었다. 길가메쉬의 저택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억눌러 왔던 감정이 단번에 턱 끝까지 차올랐다.
"……."
심장이 뛰었다. 처음 듣는 거친 목소리로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했다. 의식이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붙잡고 있던 온기도. 길가메쉬가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을 살리고자 했는지 카르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던 그를, 아이를 위해서 라고는 하나 먼저 놓은 것은 자신이었다.
"카르나 씨?"
계단의 난간을 짚고 멈춰선 카르나를 린이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계단을 내려섰다. 점점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한때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상대의 곁으로 가는 일이 이리도 두렵고, 기쁠 줄이야.
카르나가 있던 방이 여과 없는 밝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널따란 거실을 채운 것은 얇은 커튼을 거쳐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었다. 카르나의 기억보다 훨씬 휑해진 거실에는 이런저런 가구 대신 아기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너덜너덜해진 소파 위에, 한 남자가 눈을 감은 채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복도와 거실의 경계에서 카르나는 다시 멈춰 섰다. 린은 별다른 말 없이 카르나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뒤 등을 돌렸다. 그녀의 가벼운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거실은 도로 적막해졌다. 카르나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우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함을 깬 것은 높고 가느다란 웅얼거림이었다. 잠든 것처럼 보였던 길가메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벌써 깼느냐? 저런, 더 잘 것이지."
"우, 아우."
"그래, 옳지. 착하구나."
포대기에 감싸진 아기를 어르는 길가메쉬의 손놀림은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한껏 뻗어 나온 아기의 손이 까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뺨을 건드렸다. 누가 봐도 다정한 부모의 모습이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카르나는 한 발을 내딛었다.
"길가메쉬."
이전에는 그의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혀끝까지 도는 맥박이 발음을 미끄러뜨렸다.
서툰 부름에도 길가메쉬는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붉은 눈동자는 카르나를 향하며 점차 차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본래 잘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건만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한 걸음 내딛었던 발이 다시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본 길가메쉬의 입에서는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카르나가 좁히지 못했던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온 길가메쉬는 말없이 아기를 넘겨주었다. 얼결에 포대기를 받아든 카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팔에 전해져 오는 온기는 따스하고 무거웠다. 자신의 안에서 소중하게 지켜 왔던 생명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마, 아."
길가메쉬와 똑 닮은 붉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던 아기가 방긋 웃으며 카르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홀린 듯이 카르나도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덮은 옅은 색의 머리카락은 금발보다는 은발에 가까워 보였지만, 카르나가 보기에 아이는 전체적으로 길가메쉬를 닮아 있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카르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길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 아이를 살아서 보고 팔에 안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잠시 카르나의 턱이나 입술을 제멋대로 만지며 까르륵대던 아기는 곧 졸린 듯이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내뱉었다. 그저 엉성하게 안고만 있을 뿐인 카르나의 팔이 저 나름대로는 편안했는지 하품 몇 번에 금방 눈을 감은 아기를 길가메쉬가 다시 넘겨받아 요람에 눕혔다. 세상모르게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카르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나와 너의 아이인가.
"그래, 우리 아이다."
카르나가 미처 하지 못하고 삼킨 말을, 길가메쉬는 단호하게 끝맺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입을 꽉 다물며 시선을 들자 바로 앞에 길가메쉬가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차갑게 굳었다고 생각한 눈동자는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카르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가메쉬."
"……."
"……고맙다."
결국 억누르지 못한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내게 살 이유를 주어서."
처음에는 살 이유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한편에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분명 눈앞의 이 남자 때문이었다. 온 몸을 불태우는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길가메쉬의 옆에 있고 싶다는 욕망의 힘이었다. 자신이 이리도 무언가를 원할 수 있는 존재였음을 카르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강한 악력이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의 품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자신을 끌어안은 팔처럼, 카르나도 길가메쉬의 등에 팔을 둘렀다. 단단하게 맞닿은 가슴팍에서 누구 것인지 모를 거센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카르나."
"응."
"두 번은 없다. 또 다시 내 곁을 떠나려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느냐."
탁한 목소리에는 그날 밤에 들었던 초조함과 절망감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카르나는 길가메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바라는 바다."
"……."
"나도 네 옆에 있고 싶다."
카르나의 대답에 잠시 침묵한 길가메쉬는 이윽고 짧게 웃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이 끌어안는 힘이 강해졌다. 움직일 수 없었다. 팔 뿐만이 아니라, 길가메쉬의 존재 자체가 카르나를 단단하게 얽어매고 있었다. 자신의 몸과 정신에 뿌리를 내린 속박을 카르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자신은 살아갈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