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욱."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구토감에 카르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막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목구멍 안쪽을 맴도는 역겨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옆에 있던 컵에 담긴 맹물을 한 모금 머금자 그것마저 비리게 느껴졌다. 가만히 기다리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오히려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에 더 속이 안 좋아질 뿐이었다.
결국 카르나는 음식을 만든 이름 모를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흰 접시에는 네모반듯한 계란말이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거의 한 수저도 뜨지 못했음에도 이상하게 체한 것처럼 가슴께가 답답했다. 더 있어도 식사는 무리일 듯싶어 식당을 나섰다. 조용한 복도에 타박타박 발소리가 울렸다.
비록 우르크의 궁전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길가메쉬의 저택은 넓고 화려했다. 현대 일본 기준이라면 궁전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수준이었다. 저택은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깨끗했고, 식사 때마다 정갈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길가메쉬가 어떤 수를 썼는지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길가메쉬가 외출하고 나면, 카르나는 넓은 저택에 혼자 남겨졌다. 못 견딜 것은 없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고독은 찾아오는 법이었다. 홀로 있는 것은 인파 속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새삼스레 찾아온 적막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밖으로 나가는 대신 카르나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벽에 난 큰 창문은 오후의 햇빛을 함빡 빨아들였다. 햇빛에 끌려 창문을 열자 생각보다 찬 바람이 불어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카르나는 창문 옆에 놓인 길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발치의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의 마력 부족을 의미했다. 카르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그의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생명은 끊임없이 마력을 원했다. 먹을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아끼는 편이 나았다.
눈을 감은 순간,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발걸음이었다. 아무 제한 없이 이 저택에 출입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길가메쉬가 오늘은 일찍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르나는 조금 몸을 틀어 자세를 고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조금 멀어지는 것 같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는 인상을 찌푸린 길가메쉬가 서 있었다. 카르나와 시선이 맞자, 그는 순간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자고 있는 줄 알았거늘."
"……아니, 막 누운 참이었다. 오늘은 귀가가 일렀군, 길가메쉬."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는데 누워서 인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르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문가로 다가갔다. 길가메쉬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대체 나가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닿는 곳에 재물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의 속성은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전에 온 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토의 빌딩 몇 채가 정체 모를 외국인한테 넘어갔다는 얘기가 있다나. 꽤 본격적으로 현대 생활을 즐기고 있는 길가메쉬의 모습은 경탄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카르나의 귀에, 길가메쉬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그래. 모처럼 일찍 와 봤건만, 저건 뭐냐?"
"저거라니?"
"점심 말이다, 점심."
"아."
작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식탁에 그대로 남겨진 식사를 보고 온 모양이었다. 길가메쉬의 얼굴이 한층 더 찡그려졌다.
"뭐가 문제냐. 입에 맞지 않았느냐?"
"아니, 그건 아니다. 그냥."
"가뜩이나 마력이 부족할 터인데, 이젠 식사마저 하지 않으려는 게냐? 목숨을 끊으려면 더 쉬운 방도를 택하도록 하여라. 굶어 죽은 시체는 꼴도 보기 싫으니."
비웃음이 가득한 그의 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발끈하는 대신, 카르나는 담담히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입맛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입덧이라는 것이겠지."
"……."
"일전 에미야 저에 머물 때부터도 다소 식욕이 줄긴 했다만, 오늘처럼 심한 적은 처음이다. 식재료를 낭비하는 꼴을 보여서 면목 없군. 남은 음식은 저녁으로 먹어 볼 테니, 버리지 말아다오."
"허, 누가 그깟 음식이 아까워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는 게냐."
"아닌가?"
"……."
순수함마저 느껴지는 되물음이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길가메쉬는 이윽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되었다. 너랑 이야기를 나누면 괜히 열이 나는구나.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잠을 자든 햇볕을 쬐든 마음대로 하고 있어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르나를 멀어지던 붉은 시선이 쏘아보았다.
"혹여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
"저 남은 음식에 다시 손 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알았다."
"눈은 왜 피하느냐, 눈은."
*
그렇게 나간 길가메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카르나를 찾았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르나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거실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카르나는 말을 잃었다.
"어떠냐, 카르나!"
"……."
"하, 왕의 아량에 말을 잃을 정도로 감복했느냐?"
"대체 이게 무슨."
카르나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거실의 광경은 뷔페라는 곳의 모습과 같았다. 테이블과 소파 등은 전부 치워지고 제각각의 요리가 가득 담긴 탁자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문제라면 그것을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과 여러 이국의 향이 섞인 공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 중에는 카르나에게 익숙한 향신료의 향기도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최상품인 요리뿐이다. 아무리 입덧이란 놈이 고약하다 하나, 이 중에 하나쯤이라면 먹을 게 있겠지."
아니 그러하냐? 식탁에 기대 서 있던 길가메쉬가 입꼬리를 올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러나 카르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막은 채 점점 파랗게 질려가는 카르나의 얼굴색을 보며, 길가메쉬는 눈을 치떴다.
"카르나?"
"……우욱."
참으려고 해 보아도 목구멍 깊은 곳에서 헛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경악한 길가메쉬의 시선을 뒤로 하고, 카르나는 계단을 달려올라 도망쳤다.
"미안하다."
"……."
"정말 미안하다."
구역질이 나온다 해도 먹은 것이 없으니 토할 것도 없었다. 결국 신물만을 잔뜩 뱉어낸 채, 카르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누였다.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길가메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카르나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어떤 연유에서든 네가 그토록 마음을 써 준비해 주었는데, 한 술도 먹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이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길가메쉬."
"……."
그러나 길가메쉬의 입은 여전히 꾹 다물어진 그대로였다. 어쩔 수 없이 카르나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정적을 깬 것은 길가메쉬의 긴 한숨이었다.
"무엇이면 먹겠느냐."
"음?"
"그 잡종이 만든 음식이라면 먹겠느냐?"
"네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길가메쉬."
"……제길, 에미야 시로 말이다! 그 놈 집에 있을 때에는 제대로 식사를 했다 하지 않았느냐!"
"아."
그렇긴 했다. 에미야 저에 머물 때에는 식욕은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먹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시로가 만들어 주는 음식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정성이 가득 담긴 것이 젓가락 끝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마음을 담아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전의 이야기로, 뱃속의 생명이 성장한 지금은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에에이, 그 놈을 잡아다 전속 요리사로 고용하면 되겠느냐? 응? 아니면 아예 그 집을 이 마당에 옮겨다 놓으면 되겠느냐!"
"아니, 그럴 것은 없다.…… 그런데 길가메쉬."
"뭐냐!"
카르나는 자신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폭주하는 길가메쉬를 차분하게 제지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카르나는 물었다.
"왜 그렇게 나의 식사를 신경 쓰는 건가?"
단순히 오기를 부리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카르나는 서번트였다. 일반 임산부의 입덧처럼 걱정할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마력의 소모는 잠을 자면 견딜 만 했고, 그러니 한 끼 정도 굶는다고 하여 별다른 이상이 생길 리는 없었다. 길가메쉬도 이를 알고 있을 터였다.
곧게 올려다보는 카르나의 눈빛에, 길가메쉬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두 번째로구나. 아니, 세 번째인가."
"?"
"매일같이 같은 답을 해야 하는 질문뿐이니 지루하기 그지없구나. 이제 네 질문에는 답해 주지 않겠다."
"대체 무슨 말인가, 길가메쉬."
"시끄럽다. 모르겠으면 잠이나 자거라."
구부린 손가락이 하얀 이마를 툭 치고 지나갔다. 보기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이 떠나가자 그 자리에는 간질거리는 온기만이 남았다. 한참 뒤까지 카르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
"윽."
일순 시야가 검게 변했다. 카르나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점차 빛이 돌아왔다. 손끝에 식은땀이 묻어나왔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된지 사흘이 흐른 아침이었다.
"괜찮아, 카르나 씨?"
"……응."
맞은편에 앉은 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에는 당연하게도 힘이 없었다. 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걸. 큰일이네."
"무슨 넋 빠진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걸 해결하라고 네녀석을 데려온 거다!"
"길가메쉬, 손님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된다."
"에에이, 넌 가만히 있어라!"
카르나의 본의 아닌 단식이 이틀째에 접어들던 날, 길가메쉬는 분을 참지 못하며 에미야 저로 쳐들어갔다. 따라 나갈 수 없었던 카르나는 혹시 에미야 저 쪽에서 마력의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길가메쉬는 양손에 3단 찬합 도시락을 든 멀쩡한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안에는 카르나에게도 익숙한 시로와 사쿠라의 수제 요리들이 담겨 있었다. 보기 드물게 흐트러진 도시락의 모양새가 길가메쉬의 독촉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카르나는 그것조차 먹을 수 없었다. 분명히 맛있어 먹었던 음식들이건만 입에 대는 순간 구역질이 나왔다. 이쯤 되니 속이 안 좋다기보다는 몸이 음식 자체를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도시락을 집어던져 부수려 하는 길가메쉬를 창백한 얼굴로 뜯어말리고, 그릇을 돌려주고 오라며 등을 밀어 내보낸 것이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 좀, 설명이라도 먼저 해 주고 끌고 오든지 해야 할 거 아냐! 이 폭력 금삐까!
- 시끄럽다, 계집!
현관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길가메쉬의 뒤에는 아직 잠이 덜 깬 것이 분명한 린이 부루퉁한 얼굴로 서 있었다.
"미안하다, 린. 나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게 되었구나."
카르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홍차를 홀짝이던 린이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냐. 어차피 잠도 다 깼어. 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하지. 그런데 이 홍차 맛있네."
"흥, 나의 거처에 어느 하나 허투루 된 물건이 있을 성 싶으냐?"
"예, 예. 귀한 차 내주셔서 가아암사합니다~. 그럼 카르나 씨, 팔 좀 이리 줄래?"
길가메쉬의 말을 건성으로 쳐내고, 린은 카르나의 손목에 손을 얹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긴장에 찬 정적이 흘렀다. 길가메쉬도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었다. 꽉 감겨진 눈과 다물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린 순간, 린이 눈을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마력이 텅 비었어."
"……음."
"카르나 씨가 내 서번트도 아니니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몸에 있는 마력 패스가 아이 때문에 좀 꼬인 것 같아. 밧줄 엉킨 거랑 비슷한 느낌인데."
"……."
"이건 내 추측이지만, 마력이 순환하는 경로 자체가 완전히 막혀 있어서 먹는 것 자체를 몸이 거부하는 모양이야. 음식 섭취도 마력의 순환 과정 중 하나니까."
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카르나에게 마력은 곧 생명력이었다. 잠으로 마력을 보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밑 빠진 독의 구멍을 좁게 만들어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마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카르나의 몸은 곧 텅 비게 될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뭐라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길가메쉬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린?"
"어?"
"이런 경우의 일반적인 대처법은 무엇이 있지? 듣기로는 저번 성배전쟁에서 시로와 세이버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들이 해결 방법을……."
"아아아아아, 그건 아냐!! 달라!! 완전 다른 문제야 그쪽이랑은!!"
"……그런가."
어째서인지 얼굴이 빨개진 린이 붕붕 고개를 내저었다. 격렬한 반대에 카르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처졌다. 카르나가 잠잠해지자, 린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길가메쉬가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였다.
"요컨대, 마력이 돌지 않고 있다는 게냐?"
"응. 억지로라도 마력을 통하게 하면 패스가 제대로 돌아올 것 같긴 한데……. 곤란한걸, 사람들한테 사냥해 올 수도 없고……앗."
자신이 말해 놓고서 깜짝 놀란 듯, 린이 입을 가리고 길가메쉬를 쳐다보았다. 길가메쉬가 피식 웃었다.
"그래, 분명 그게 효율적이긴 하겠군. 어차피 이 세상은 쓸모없는 인간들 투성이니, 이 나의 핏줄을 위해 제물이 되는 편이 낫겠지."
"길가메쉬."
"하지만 그러면 어미인 저 놈이 진짜로 단식 투쟁을 시작할 것 같으니 관두겠다."
길가메쉬는 턱짓으로 카르나를 가리켰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것처럼 진 빠지는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구나. 요 며칠간 실컷 해 봤으니."
"어머."
의외의 말에 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르나도 눈을 깜빡였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로부터 마력을 착취해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길가메쉬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경탄 반, 의아함 반이 섞인 시선을 즐기듯 코웃음을 친 길가메쉬는 곧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그보다, 마력을 통하게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간단한 방법이 있거늘 무얼 그리 돌아가려 하느냐."
카르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르나는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금빛 머리칼에 부딪혔다. 그 반짝임에 잠시 넋을 잃은 사이, 길고 하얀 손가락이 카르나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달다, 는 것이었다. 까칠해진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작게 벌어진 사이로 스며드는 숨결이, 타액이, 모든 것이 달았다. 작은 새가 먹이를 조르듯 카르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곧장 그 사이로 물컹한 살이 밀려들어와 입천장을 쓸어내렸다. 등뼈를 타고 오르는 찌르르한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카르나는 본능적으로 길가메쉬가 전해 주는 마력을 갈구했다.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온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맑아진 순간, 비로소 카르나는 이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꼭 쥐고 있던 어깨를 밀어내자 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호오, 이렇게 적극적인 너는 처음 보는구나."
젖은 입가를 훔치며 길가메쉬는 웃었다.
"어때, 조금은 숨쉬기 편해지지 않았느냐?"
카르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낯선 마력을 받아들인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길가메쉬와 나눈 첫 입맞춤은, 그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의식이었다.
*
집게손가락이 무심코 입술을 매만졌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그에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홧홧했다.
몸을 겹쳐도, 입술을 겹친 적은 없었다. 길가메쉬는 입맞춤을 요구하지 않았고, 카르나는 요구받지 않은 것을 베풀지는 않았다. 오가는 것은 일순의 쾌락일 뿐, 어떤 온기나 감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의 피부와 체액이 그렇게나 뜨겁다는 것을, 카르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흥, 결국엔 별 쓸모가 없었군. 그 계집."
식탁 맞은편에 앉은 길가메쉬가 부루퉁하게 투덜거렸다.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고, 카르나는 다시 젓가락을 그릇으로 향했다. 폭신폭신한 계란말이는 아주 맛이 좋았다.
"린은 최선을 다해 줬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도 몰랐을 게 아닌가."
"그걸 해결한 건 이 몸 아니더냐."
"고맙다."
"호오, 말로만?"
길가메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요사스러운 표정을 할 때의 길가메쉬는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해 온다는 것을, 이제는 카르나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도망갈 곳은 없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카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라."
"쯧, 어리석기 그지없는 베푸는 영웅아. 그 나쁜 버릇은 나아지질 않는구나. 내가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이미 목숨도 요구받은 몸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내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군."
어디까지나 담담한 카르나의 태도에, 일순 길가메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카르나는 물론, 길가메쉬 자신마저 눈치 채지 못할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거절하지 않겠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흐음, 좋다."
길가메쉬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솟았다.
"방을 옮겨라. 내 방으로."
"……?"
"이미 짐은 다 옮겨 놨다."
"길가메쉬, 그게 무슨."
당황한 카르나와 달리, 길가메쉬는 여유롭게 물이 담긴 유리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까 토오사카도 말하지 않았더냐. 아직은 꾸준히 외부로부터의 마력 공급이 필요하다고."
"……."
"너도 조만간 다시 날 원하게 될 터인데, 가까이 있는 것이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
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도 없었거니와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기도 했다. 길가메쉬가 그렇게 말한 이상, 이미 결정된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그리 알고 있어라."
대답은 듣지 않은 채 길가메쉬는 일어서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순간, 카르나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길가메쉬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그가 공급해주는 순도 높은 마력은 지금의 카르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 저택에서 제일 넓은 방인 만큼 불편할 일도 없을 것이다. 혹여나 이제 와서 그가 자신의 몸을 요구한다 해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으니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직감이 낳은 고집이었다. 몸에 깃든 새로운 생명의 뿌리는 깊었다. 그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이 남자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아이를 낳은 뒤, 이 몸의 생명이 다해서 기억만이 남아 좌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 너머의 영원까지.
보이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남긴 흔적은 여전히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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