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게 벼려진 푸른 시선이 과녁을 응시했다.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고, 한계까지 당겨진 활시위가 팽팽하게 진동했다. 밤벌레들도 울음을 멈춘 순간, 한껏 숨을 죽인 화살이 정적을 가르고 허공을 날았다. 곧 화살이 과녁에 가 꽂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활을 내리고, 카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곧게 꽂힌 화살 깃이 보였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 궁술을 연습하고 싶다고?
카르나의 드문 부탁에 등을 돌린 길가메쉬는 한 쪽 눈을 치켜떴다.
- 네가 지금 무술을 연마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심지어 그 몸으로?
-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다, 길가메쉬. 이대로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더 상태가 나빠질 것이다. 린도 말하지 않았나.
- …….
- 전에도 생각했던 일이지만, 활을 쏘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카르나의 몸 상태를 진찰하기 위해 왔다가 졸지에 진한 입맞춤을 눈앞에서 감상하게 되어버린 린은 빨개진 얼굴로 화를 내면서도 몇 가지 충고를 하고 돌아갔다. 그 중 하나가 '적당히 몸을 움직일 것'이었다. 마력의 소모를 걱정한답시고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흐름이 나빠질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마력이 부족하면 내가 주겠다 하였거늘.
- 그런 문제가 아니다. 왜 자꾸 말을 돌리는가?
- 흥. 네 녀석은 여전히 흥취가 없구나.
- 네가 말하는 흥취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느릿하게 뺨을 쓸어내리는 길가메쉬의 손가락을 떼어내자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돌아왔다.
- 뭐, 좋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 정말인가.
- 그래. 준비해 두마.
- 고맙다.
- 어딜 그냥 가려고.
조용히 미소 짓는 카르나의 얼굴을 길가메쉬의 손이 잡아챘다. 이제는 카르나도 다가올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눈을 감자 입술에 따스한 것이 닿았다. 익숙하게 흘러들어오는 온기에 뱃속의 생명이 작게 발버둥쳤다.
길가메쉬는 약속을 지켰다. 그날 저녁, 카르나는 있는 줄도 몰랐던 별채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자리엔 번듯한 궁도장이 들어섰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활을 쏠 장소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려 봤자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요청한 건 자신이었고, 만들어진 장소를 안 쓰는 것도 아까운 일이었다. 화살을 집어 들며, 카르나는 그와 함께 지내며 자신 역시 조금은 변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겼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눈이 가려졌다 하여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세상이 고요에 젖어드는 이 순간을 카르나는 좋아했다. 아이 역시 그의 기분을 아는 것처럼 이때만큼은 숨을 죽였다. 모든 감각이 하나에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을 놓은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올 사람이라면, 그리고 카르나가 활을 쏠 때까지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아직까지 여기 있었나."
"길가메쉬."
목소리가 불퉁했다. 활을 내리고 몸을 돌리자 눈에 들어온 표정 역시 그랬다.
"활을 쏘러 간다고 말은 했을 텐데."
"이 시간까지라고는 들은 적 없다. 시간이 몇 시인 줄 아느냐?"
"……에취."
모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해가 졌으니 저녁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바람도 부쩍 차가워져 있었다. 대답 대신 재채기를 내뱉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가메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몸은 스스로 간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밤중에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게 새끼를 품은 어미의 행동이란 말이더냐? 응?"
"미안하다. 나의 불찰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활을 손에 잡아 조금 들떴을지도 모른다. 길가메쉬의 질책은 정당했다.
"내게 미안할 게 무어 있느냐.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한 건 너인 것을."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그는 손에 든 웃옷을 던졌다. 카르나의 것이었다. 얼결에 받아들고 눈을 깜빡이자 길가메쉬는 아예 몸을 틀었다.
"더 있을 테냐?"
소매에 팔을 끼워 넣으며 카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했다. 그를 힐끔 돌아보는 길가메쉬의 눈빛은 아까보단 부드러웠다.
*
그 뒤로 카르나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궁도장이 되었다. 가끔 길가메쉬도 궁도장을 찾아왔다. 보통 하는 말이라고는 이게 무에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다는 투덜거림과,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냐는 이유 모를 재촉이 주를 이루었지만 특별히 방해되는 짓은 하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여, 앉기만 해도 절로 나태해질 것처럼 생긴 의자와 그에 딸린 조그만 탁자가 어느 순간부터 궁도장 한편에 자연스레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길가메쉬는 그곳에 앉아 대낮부터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화살을 꺼내던 카르나가 잠깐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길가메쉬."
"왜 그러느냐."
"오늘은 바깥에 용건이 없는 것인가?"
"없다."
"따로 할 일도 없나?"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정신이 흐트러지느냐?"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길가메쉬는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의 궁술이란 지켜보는 이가 있으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더냐?"
"그렇지 않다."
"그럼 아무 문제 없구나."
계속해라, 그는 과녁 쪽을 턱짓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흡사 어디 나들이 나온 돈 많고 시간 많은 높으신 분 모양새였다. 아니, 그냥 그것인가. 카르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려놓고 시위를 당겼다. 곧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소리가 들렸다. 부러 햇빛을 피해 눈을 찌푸리지 않아도 명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르나는 이미 제 손을 떠난 화살의 행방을 확인하는 대신 다음 화살을 집어 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화살통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카르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영령의 무기처럼 마력을 담아 쏘아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소 힘에 부쳤다. 어느새 이마에 흘러내린 한 줄기 땀을 닦는 사이 등 뒤에서 성마른 손뼉 소리가 들렸다.
"꽤 하는구나."
짝, 짝, 짝. 딱 세 번을 울리고 끝난 박수는 그래도 그 나름의 칭찬이었던 모양이다. 길가메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과녁과 카르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맞서, 카르나는 활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궁병으로 현계한 자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니, 한 번 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하, 헛소리를."
코웃음을 친 길가메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는 하나, 단순히 활을 다루는 기술이라면 난 너에 미치지 못한다. 나의 뛰어남은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니니."
카르나 앞에 선 길가메쉬는 오만하게 웃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었다. 새삼, 그가 왕이라 불리는 존재임을 실감했다.
"그렇지만……, 그래. 나쁘지 않군."
"?"
한 걸음 더, 길가메쉬가 가까워졌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숨결도 닿을 수 있을 거리에서, 그는 멈춰 섰다. 옅은 미소를 바탕으로 햇빛을 받은 붉은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저도 모르게 그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간 순간, 카르나는 조금 몸을 뒤로 뺐다. 그렇지만 길가메쉬가 더 빨랐다. 그의 팔이 자연스레 카르나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길가메쉬!"
"허, 여전히 삐쩍 마른 몸이구나."
"대체 어디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건가."
질책의 목소리는 그의 귓바퀴에도 닿지 못한 듯싶었다. 길가메쉬는 아예 카르나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얹었다. 밤이 아닌 낮에, 천 몇 겹을 통해 전해져 오는 온기가 낯설었다. 억지로 떼어낼까 싶었지만 먹혀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하고 있던 사이, 유려하게 뻗어 나온 손가락이 아주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복부의 미세한 굴곡을 쓰다듬었다.
긴장에, 몸이 굳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가장 컸으나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그마저 길가메쉬의 평온한 목소리가 잘라냈다.
"우리 아이는,"
"……."
"활 하나는 잘 쏘겠구나. 어미가 지금부터 이리도 활을 쏴 대니."
카르나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뜻은 평범했지만, 그것은 길가메쉬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우리 아이.
그는 지금까지 카르나가 뱃속에 품고 있는 것을 제 것, 혹은 왕의 씨 정도로만 칭했었다. 카르나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가 자신에게 신경 써 주는 것은 그저 제 피가 섞인 희귀한 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들은 말은, 달랐다.
아주 먼 기억이 지나갔다. 낡은 마부의 집에 살던 부부는 절대 고결하지는 않았으나 서로를 사랑했다. 높은 이 앞에서는 비굴하게 일그러지는 얼굴도 자신들의 아이를 안을 때에는 부드럽게 풀렸다. 우리 아이. 사랑하는 내 아가. 카르나 자신은 그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나, 적어도 양부모가 동생들에게 내렸던 애정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가메쉬의 말은, 그리고 손길은, 평생 카르나가 욕심내지 않았던 그런 따스한 것과 닮아 있었다.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제법 볼 만한 구경거리로고."
"길가메쉬. 너는……."
어느새 포옹을 푼 길가메쉬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카르나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 그는 속삭였다.
"이제 더 이상 그 바보 같은 질문은 안 하게 되었구나. 칭찬해 주지."
"……."
"머지않아 너는 답을 알게 될 것이다."
손가락이 떼어지고 대신 입술이 와 닿았다. 그의 등 뒤로 내리치는 햇빛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낯설고 간지러운 부끄러움에, 카르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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