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야 말해 미안하다. 하지만 너는 내 딸이란다.
- 사모님, 지금 이게 무슨…….
- 나도 너무 어렸어. 도저히 너를 키울 수가 없었단다. 용서해 주렴…….
털썩, 누군가가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현실이 아닌 화면 속에서.
리모컨의 채널 이동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채, 카르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반짝한 아침의 햇살이 거실을 물들이는 오전 아홉 시.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질척질척한 애증과 출생의 비밀로 범벅이 된 드라마였다.
왜 인기가 많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전개되는 내용과 얽히고설킨 혈연관계,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싸움은 무료한 아침에 딱 좋은 자극이다. 하지만 과연 태교로서는 어떨까. 당연히 좋을 리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카르나는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
리모컨을 내려놓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닿는 배의 느낌이 낯설었다.
아이가 들어 있는 몸은 이전보다 부풀어 올랐다고는 하나 여전히 헐렁한 옷을 입으면 가릴 수 있는 정도로, 평범한 임산부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본래 신체적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영령의 몸이었던 만큼 조그만 변화에도 느껴지는 위화감은 컸다.
앞으로 이 아이를 품고 있었던 시간과 비슷한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 길게 느껴져도, 이미 지나온 정도의 시간이란 금방 흘러가는 법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이 팔로 안는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 한 부분이 울렁였다. 기쁨과 두려움이 혼재된 두근거림에 카르나는 살며시 가슴팍을 눌렀다. 처음으로 숨을 들이쉬게 될 아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자신은.
화면 안에서, 망연자실한 딸을 앞에 둔 어머니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런 댓바람부터 무에 저리 구질구질한 걸 보고 있느냐."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등 뒤에서 밤을 끄는 듯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고 카르나는 대꾸했다.
"댓바람이라고 할 만큼 이른 시간은 아니다만, 너의 기상 시간으로는 확실히 이르군."
"흥, 아침부터 입만 살아서는."
이제는 익숙해진 코웃음과 함께, 길가메쉬가 옆에 걸터앉았다. 옆으로 세워진 쿠션 하나가 끼워질 정도의 거리는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었다. 손에 든 커피 잔을 홀짝이는 길가메쉬에게 딱히 카르나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힐끔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텔레비전을 향했다. 조용한 거실에 잡음 섞인 흐느낌이 울렸다.
- 미안해, 미안해…….
그러나 의식마저 눈길처럼 쉽게 돌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흐트러진 생각의 결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현재를 빠져나갔다.
- 이제 와서, 염치없는 어미라는 건 알지만…….
여배우의 입을 빌어,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말했다.
- 카르나. 당신은 나의 아들입니다. 이제야 찾아온 어미를, ……용서해요.
항상 꼿꼿하고 당당하던 여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너져 내렸다. 한때는 먼발치에서 올려다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왕녀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는 광경은 액자 안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 하지만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이제부터라도, 그럴 수 있잖아요? 당신은 위대하신 태양신의 자식이자, 나, 쿤티의 맏아들입니다. 누구도 당신을 무시할 수 없어요. 피를 나눈 형제와 싸울 필요도 없어요.
카르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 자가 자신의 어머니인가. 어머니, 본래라면 이 여인에게 향하였을 말을 입 안으로 되새겨 봐도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원망이 새삼스레 불타오르는 일도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크샤트리아의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태양신의 신물을 몸에 두른 아기라 해도 차마 제 손으로는 키울 수 없었던 어린 공주의 두려움을, 카르나는 이해했다.
- 돌아오세요. 그리고 영광을 얻어요.
그러나 어디로 돌아가면 좋단 말인가? 이제 와 나타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가 얻을 수 있는 영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그녀의 곁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쿤티의 마음속에 영원히 비어 있을 곳은 강물에 떠내려간 갓난아기의 자리일 뿐.
-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카르나가 할 수 있는 긍정의 말이란 그뿐이었다. 그 때의 카르나가 있을 곳이란, 피를 나눈 형제보다는 우정을 나눈 친우의 곁에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담담하게 일별했던 그 뒷모습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목울대에 진득하게 맺혔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응?"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카르나를 다시 지금으로 불러들였다.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은 길가메쉬가 눈살을 찌푸린 채 카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봐주겠군."
화면이 작은 잡음을 내며 까맣게 물들었다. 그의 손에 리모컨이 가 있다는 사실도 미처 눈치 채지 못했었다. 다시 뺏으려 해 봤지만, 카르나의 손이 가 닿기도 전에 길가메쉬는 그것을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그렇게 시끄러웠다면 말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카르나는 리모컨의 잔해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숨이 절로 들이켜졌다.
"……잠깐, 길가메쉬?"
"가만히 있어라."
길가메쉬의 팔이 카르나의 등과 다리를 받치고 가볍게 안아 올렸다. 성인 남성을 들어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역시 영령은 영령, 거실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일까, 오늘의 길가메쉬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굳이 이런 상태로 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날선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카르나는 더 묻는 것을 포기하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과 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은, 이미 확신이 된 지 오래였다. 이 집에 살게 된 뒤, 길가메쉬가 카르나에게 보이는 태도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언정 근본적으로는 배려였다. 그것도 꽤나 지극한. 그러니 어찌되었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묘한 침착함에 휩싸인 카르나는, 침실 문을 발길질로 열어버린 길가메쉬가 자신을 침대에 반쯤 내던질 때까지 얌전히 그의 팔에 안겨 있었다.
"……."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침실은 아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자신을 가두고 내려다보는 그늘진 얼굴을 향해, 카르나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는가."
"네 녀석에게는 정신적으로 자해하는 취미라도 있느냐?"
"무슨 말인가."
"아니면,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에게 세상에는 바란 적 없는 자식을 버리는 어미도 있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려 주려는 게냐?"
"……."
카르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길가메쉬의 말은 언어 자체가 담고 있는 뜻보다 더 깊은 곳에 닿았다.
다종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불려온 영령들이었지만, 성배가 부여하는 지식에 의해 서로가 어떤 과거를 지닌 영웅인지는 대부분 파악이 가능했다. 길가메쉬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카르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는 말 그대로 '알고 있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아이의 삶은 그 나름대로 영광스러웠다. 저주에 스러졌을지언정 찬란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자신의 삶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카르나는, 뱃속에 있는 이 작은 생명에게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사랑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사랑스러웠다. 비록 바란 적 없는 아이라 해도, 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아이가 애틋하지 않을 리 없었다.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한 적도 없다.
아이는 끈이었다. 마스터가 없는 자신을, 육신을 받은 이유를 찾지 못하던 자신을, 이 땅에 붙들어 매 주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창이 될 수 없는 약해진 몸으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단지 그렇기에, 열 달 동안 품었던 아기를 놓아 보내던 어린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 와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라."
낮은 한숨과 함께, 팔목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눈가를 쓸었다. 공기를 옥죄던 날카로움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까부터 목을 간지럽히던 뜨거움이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카르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던 녀석이 아침부터 그리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야."
"길가메쉬."
"멍청한 놈. 네가 저깟 것에 이제 와 마음이 불편해질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잔악무도한 것은 네놈의 어미였거늘."
"그런 말 하지 마라."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인류의 여명을 이끈 왕의 눈은 지울 수 없는 오만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현명했다. 카르나 자신조차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길가메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렸다.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단 하나, 어머니를 깎아내리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었지만. 카르나의 불만을 길가메쉬는 코로 웃어넘겼다.
"진실의 입을 가진 놈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내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했다더냐?"
"어머니는……."
"내 앞에서 그 여자의 변호 따위는 집어치워라. 이유가 무어라 하건, 제 새끼를 내버리는 부모를 어찌 무도하지 않다 하겠느냐."
"……."
반박할 말도 잊은 채, 카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극히 평범하고 도덕적인 정론이었기에, 오히려 길가메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순간 눈앞에 에미야 저 앞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을 가득 메우던 빛의 물결, 발치에 꽂힌 검, 손목에 매인 사슬.
"……하지만, 너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했던 것은 오히려 길가메쉬였거늘.
"하, 왕은 본디 모두 잔악무도한 법이다."
끝내지 못한 물음의 대답에는 가벼운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흔들리는 카르나의 눈동자를 길가메쉬는 어딘지 재밌어하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먹이를 잡은 포식자처럼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진위가 어디에 있는지, 카르나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견식은 그의 앞에선 빛을 잃었다. 길가메쉬가 자신을 옆에 두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았다.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이유만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때로 알 것 같은 순간이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방금처럼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에 닿는 순간이나, 입맞춤에서 마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달콤함을 느꼈을 때가 그랬다. 하지만 처음으로 겪어보는 그런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생전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성배로부터 부여받은 지식에서도 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온전히 지금 이 곳에 몸을 받아 살아가는 카르나의 몫이었다.
"카르나."
아래로 내려간 길가메쉬의 손이 카르나의 배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네가 이 조그만 것을 놓지 않듯, 나도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열기가 몸을 얽어맸다. 자연스레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올라가는 심장 박동수에 뱃속의 생명 역시 작게 바르작댔다. 자신을 이 땅에 매어두는 것들, 그 중 어느 것 하나 놓고 싶지 않았다.
브라운관 속의 작은 세계는 더 이상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따스함만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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